미생 드라마 리뷰 (사회초년생, 직장생활, 미완성)
저도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이 드라마를 봤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장그래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바둑 대신 학교와 캠퍼스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회사라는 곳에 던져졌을 때, 그 막막함이 화면 속 장그래의 표정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미생은 그런 드라마입니다. 성공담이 아니라, 그냥 버티는 이야기.
미생 드라마 리뷰 - 바둑판 밖으로 나온 사람, 그리고 저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바둑만 해온 인물입니다. 프로 기사(棋士), 즉 바둑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선수가 되기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프로 입단 시험에서 결국 탈락합니다. 입단(入段)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공식으로 인정받아 프로 무대에 오르는 자격을 뜻합니다. 그 문이 닫히는 순간,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스펙도 없이 대기업 '원인터내셔널'에 인턴으로 들어서는 장그래를 보면서, 저는 제 첫 출근날이 겹쳐 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회사에 들어가니 모르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업무 용어부터 조직 문화까지, 회사는 제가 알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흔히 이런 경험을 두고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말을 씁니다. 사회화란 개인이 특정 집단의 규범과 가치관, 행동 방식을 익혀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학교와 회사는 사회화의 규칙 자체가 다릅니다. 장그래가 힘든 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새로운 규칙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장그래의 이야기는 바둑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처음 세상에 나온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드라마가 단순히 '취업 준비 안 된 사람의 고군분투'를 다룬다고 보는 시각에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건 준비가 충분했어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벽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직장생활이라는 현실, 그 안의 사람들
미생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조직 내 인간관계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상식 과장은 처음에는 그냥 까다로운 상사처럼 보입니다. 장그래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몰아붙이고,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장그래를 대하는 방식이 단순한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저도 직장 초년 시절에 오상식 같은 상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왜 저렇게 까다롭게 구는 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분이 저를 혼낸 게 아니라 가르쳤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드라마에서 동기들인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도 각자의 방식으로 조직 내 생존을 모색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보여주는 조직 적응 유형입니다. 관련 연구에서도 신입 구성원의 조직 적응 방식은 크게 아래처럼 나뉩니다(출처: 학술연구정보서비스 RISS).
- 동화형: 조직의 기존 문화와 규칙을 빠르게 흡수하고 따르는 방식 — 장백기의 경우처럼 조직 논리를 수용하며 안정을 추구합니다.
- 분리형: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적응하는 방식 — 안영이처럼 자기 기준을 지키며 인정을 얻으려 합니다.
- 통합형: 조직과 자신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며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방식 — 장그래가 결국 택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분류가 흥미로운 건, 드라마가 어느 방식이 옳다고 단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방식에는 장단이 있고, 그 선택이 이후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열심히 하면 된다'는 교훈 대신, 어떤 방식으로 조직 안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미생(未生)이라는 단어가 품은 의미
이 드라마의 제목인 미생(未生)은 바둑 용어에서 가져왔습니다. 바둑에서 완생(完生)이란 더 이상 공격받지 않도록 두 집 이상을 확보한 상태, 즉 살아 있는 돌을 뜻합니다. 반대로 미생이란 아직 완전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태의 돌을 말합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드라마는 이 단어를 회사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합니다. 장그래뿐 아니라 오상식도, 안영이도, 임원들도 결국은 각자의 자리에서 미생입니다. 어떤 직급에 있든 완생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제법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회 초년생이던 제가 '저 분들은 다 안정적이겠지'라고 생각하며 힘들어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높은 직급의 인물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캐릭터 서사(narrative)라는 측면에서도 미생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서사란 인물이 특정 사건을 통해 변화해 가는 이야기 구조를 뜻하는데, 미생의 각 인물들은 하나의 큰 사건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작은 실패와 선택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게 현실과 닮아 있습니다.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루하루의 반복이 사람을 바꾸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이 드라마가 직장인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로를 주기보다는 공감을 줍니다. "당신만 힘든 게 아니다"라는 말을 직접 하지 않으면서도, 화면을 통해 그걸 느끼게 합니다. 공식 채널(tvN 미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직장인 시청층에서 이례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미생을 다시 떠올리면, 장그래가 결국 성공했는지보다 얼마나 버텼는지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이 드라마를 아직 안 보셨다면, 지금 직장에서 뭔가 버겁다는 느낌이 드는 시기에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당장 답을 주지는 않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분명히 줍니다. 그리고 이미 봤던 분이라면,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보면 또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 참고: https://tvn.cjenm.com/ko/misaeng/ https://www.ris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