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학교폭력, 복수, 정의구현)

 

더 글로리 포스터

1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드라마가 아니라 누군가의 실제 기억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실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복수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보고 나면 압니다.

학교폭력, 그냥 애들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은 고등학생 시절 학교폭력(學校暴力)의 피해자였습니다. 학교폭력이란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신적·언어적 폭력 행위 전반을 뜻합니다. 단순히 주먹질 몇 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수준의 가해 행위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드라마 속 문동은이 겪는 것이 바로 그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게 정말 10대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고?"였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육부가 매년 발표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 응답 학생의 상당수가 정신적 고통을 신체적 피해보다 훨씬 심각하게 꼽습니다.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남은 상처가 더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단순히 "아직 철없는 애들 사이의 다툼"으로 보는 시각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는 재미로 한 행동일 수 있겠지만, 피해자는 그 순간부터 트라우마(Trauma)와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트라우마란 극심한 심리적 충격이 남긴 정신적 상처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동은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깊이 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복수인가, 정의구현인가 — 문동은의 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동은은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 밖으로 밀려난 채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교사가 되어 가해자 박연진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면서 복수를 시작합니다. 이 설정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게 과한 거 아닌가?"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문동은의 복수는 단순한 감정적 보복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이건 정의구현(正義具現)에 가깝습니다. 정의구현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결과를 그 행위자가 실제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해자들은 "학창시절에 좀 괴롭힌 것"이라고 기억하겠지만, 문동은의 인생은 그 시절에 이미 무너졌습니다. 가해자의 기억과 피해자의 기억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복수의 과정에서 제가 주목했던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문동은은 감정이 아닌 치밀한 계획으로 움직입니다. 오랜 시간 가해자들의 삶을 분석하고 약점을 파악합니다.
  2. 가해자들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하며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3. 복수가 진행될수록 문동은 역시 평범한 삶을 포기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4. 결국 복수는 통쾌함만이 아니라, 씁쓸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남깁니다.

이 네 가지 흐름이 더 글로리를 단순한 사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묵직한 이야기로 만드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송혜교와 임지연, 이 두 배우가 없었다면

제가 직접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송혜교의 연기였습니다. 솔직히 기대치가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는 기존 송혜교의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고, 그 온도 차이가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동했습니다.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데도 분노와 공허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연기. 이걸 캐릭터 억압(Character Suppression)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억압이란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내면에 눌러둔 채 행동으로만 보여주는 연기 방식을 뜻합니다. 보는 사람이 오히려 더 크게 느끼게 되는 역설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임지연의 박연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현실 어딘가에 진짜로 있을 것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해자를 과장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현실감(Verisimilitude), 즉 실제처럼 느껴지는 생생함이 시청자를 더 깊이 끌어들이는 장치로 작동한 것입니다.

또한 주여정이라는 캐릭터가 있어서 이 드라마가 숨을 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상처를 가진 인물이고, 그렇기에 문동은의 방식을 이해하고 함께합니다. 이 관계가 없었다면 드라마가 너무 차갑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어선 안 되는 이유

더 글로리를 보고 난 뒤 저는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어렸을 때 일'이라는 면죄부를 주는 걸까?" 드라마 속 박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멀쩡히 잘 살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과 가장 닮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피해자 보호 전문가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 중 하나가 이차 피해(Secondary Victimization)입니다. 이차 피해란 폭력 피해 이후 주변의 무관심이나 잘못된 대응으로 인해 피해자가 다시 상처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동은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무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았던 장면이 바로 이 이차 피해를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 장면에서 가장 화가 났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미성숙한 존재라는 이유로 책임을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한 사회적·제도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울, 불안, 대인관계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장기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문동은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현실입니다.

더 글로리는 보고 나서 가볍게 "재밌었다"고 말할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제가 경험한 가장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복수가 시원하게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문동은이 그 긴 시간 동안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혹시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히 복수극으로 접근하기보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보시길 권합니다. 그 시선으로 보면 이 드라마가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 참고: https://www.netflix.com/kr/title/81519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