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세대서사, 인생회고, 제주로맨스)

 

폭싹 속았수다 포스터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아이유와 박보검이 주연을 맡아 제주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를 그려낸 세대 서사형 로맨스입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는 그냥 흔한 첫사랑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당차고 요망진 소녀, 묵묵한 소년 — 두 사람의 시작

오애순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강렬합니다. 제주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 소녀는 꿈이 많고, 반항적이고, 세상을 향해 주먹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아이입니다. 반면 양관식은 정반대입니다. 말이 없고, 튀지 않고, 그냥 거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기 있음'이 이 드라마 내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보면서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세대 서사(Generational Narrative)란 한 인물 혹은 가족의 삶을 여러 세대에 걸쳐 추적하며 시대와 개인의 관계를 조망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한 사람의 유년기부터 노년까지를 한 편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이 구조를 정직하게 따릅니다. 두 주인공의 풋풋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결혼, 육아, 중년, 그리고 이별까지.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막장 설정 없이, 그냥 인생이 흘러갑니다.

제가 이 도입부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꿈 많던 시절이 있었고, 뭔가 대단한 삶을 살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애순을 보면서 그 시절의 제 모습이 살짝 겹쳐 보이는 것 같아 괜히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제주라는 공간도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주 방언(濟州 方言)이란 표준 한국어와 상당히 다른 어휘와 문법 체계를 가진 독립적인 언어 변종으로, 유네스코에서 소멸 위기 언어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제목인 '폭싹 속았수다' 역시 제주어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 애쓰셨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엔 속았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나니까 제목 하나가 드라마 전체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 결혼, 육아, 그리고 상실

드라마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애순과 관식의 관계는 로맨스에서 동반자 관계로 변합니다. 동반자 서사(Companionship Narrative)란 두 인물이 낭만적 감정을 넘어 삶 자체를 함께 지탱해나가는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설레는 감정보다는 매일의 무게를 같이 지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부분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그 장면들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드라마 속 애순처럼 저도 어느 순간 꿈보다는 일상이 먼저가 된 시점이 있었고, 그게 슬프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한 인물의 인생 전체를 보여주는 긴 호흡의 서사 구조
  2. 시대적 배경(고도 성장기, 산업화)이 개인의 선택에 자연스럽게 개입하는 방식
  3. 주인공들의 감정을 대사보다 행동과 눈빛으로 전달하는 절제된 연출
  4. 제주어와 제주 배경을 통해 지역 정체성을 드라마 언어로 녹여낸 방식

관식이라는 인물에 대해 한 마디 더 하자면, 이 인물은 캐릭터 아키타입(Character Archetype) 중에서도 흔히 '과묵한 수호자형'에 해당합니다. 아키타입이란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 유형을 말하는데, 관식은 이 틀을 따르면서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 요즘 기준으로는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답답함이 더 진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후반부, 관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애순 혼자 남는 장면에서 저는 생각보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이건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장면이기도 하니까요.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 작품은 공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세대를 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출처: Netflix 공식 페이지).

30대 중반이 이 드라마를 보면 생기는 일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20대에 봤다면 그냥 예쁜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 같은데, 30대 중반에 보니까 드라마 전체가 다르게 읽혔습니다. 애순의 20대를 보면서 제 20대가 떠오르고, 애순이 아이를 키우는 장면에서는 현재의 제 삶이 보이고, 그 뒤로 펼쳐지는 중년과 노년의 이야기에서는 제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이 보였습니다.

인생 회고(Life Review)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의미를 재정립하는 심리적 과정으로, 노년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만 때로는 강렬한 외부 자극, 예를 들면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이 과정을 앞당기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폭싹 속았수다는 그런 드라마였습니다. 보는 내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스크롤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30대가 까마득히 먼 미래 같았는데, 눈 깜짝할 새에 여기 와있습니다. 치열했던 20대, 어리숙했던 10대가 이제 기억 속 한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40대, 50대도 같은 속도로 찾아왔다가 지나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허투루 살지 말자.

폭싹 속았수다는 화려한 드라마가 아닙니다. 반전도 없고, 빌런도 약하고, 클리셰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오래 남습니다. 저는 다 보고 나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이 드라마가 그런 감정을 건드립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넷플릭스에서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단, 혼자 보다 보면 생각이 많아질 수 있으니, 가까운 사람과 함께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참고: https://www.netflix.com/kr/title/81681535